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종파사건 (문단 편집) == 끝없는 숙청 == 김일성은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자가 아니라면 같은 파벌인 [[갑산파]]라고 해도 숱하게 숙청하였으며 자신의 충복이었던 자들도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.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[[김광협]]. 김일성 반대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던 최창익은 완전히 숙청되어 [[정치범수용소/북한|정치범수용소]]에 수용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. 또한 그의 먼 친척까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시골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.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최창익의 재종손녀인데 최창익의 재종질인 아버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고 자신은 다행히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아 어머니와 함께 회령으로 추방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. 참고로 그녀의 할아버지는 최창익과 6촌 관계였으며, 이 때문에 본인의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할머니, 본인의 아버지를 포함한 이들의 자식 4형제를 포함한 총 18명의 가족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. ([[http://www.ffnk.net/board/bbs/board.php?bo_table=memoirs&wr_id=51|#]]). '''7촌 조카'''의 가족이 이 정도 꼴을 당했으니 그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. 최창익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는 [[황장엽]]의 탈북 이후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다고 하니, 그 혹독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. 북한의 악명 높은 [[정치범수용소]]는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.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'종파주의자'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. 박헌영 역시 이때 목숨이 달아났다. 최종 재판은 이루어졌지만 그가 [[미군정]]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우길 단서조차도 찾기 어려웠다. 이에 [[김일성]]은 당시 내무상 [[방학세]]에게 "방 동무, 리론가 [[박헌영]]은 지금 어떻게 됐느냐.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."라고 묻다가 나중에는 아예 "증거고 뭐고 다 필요 없다. '''오늘 밤에 목을 따버려!'''"라고 말하여 당일 비공식 사형이 집행되었다. 그의 사망 시기는 빠르면 8월 종파사건이 벌어지기 전인 7월, 늦어도 1956년 12월에서 1957년 초로 추정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